서해랑길 100코스(MRT9-6)대명항에서 외포리까지
2025년 5월 4일(일) MRT9 엿새째 날이다. 아침에 눈을 뜬 곳은 강화도로 건너가는 초지대교 입구의 한 모텔이다. 오늘은 100코스, 101코스를 걸어 외포리까지 가야 한다. 맑고 화창한 오월의 아침은 오늘이 봄의 절정이자 계절의 여왕임을 자랑하고 있다.
서해랑길 100코스 16.5km 6시간 보통


섬 자체가 하나의 역사관이자 박물관인 강화도로 떠나는 역사 탐방 길, 외세에 대한 저항이 남아있는 문화유산과 오감을 깨우는 짜릿한 루지를 체험할 수 있는 코스이다. 조선 효종 때 구축한 요새 '초지진' 중력만을 이용해 트랙을 내려오는 무동력 바퀴썰매로 동양 최대 규모의 길이를 자랑하는 '강화씨사이드리조트루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병인양요 때 승려들이 참전하여 호국도량으로 불리는 '전등사' 고려의 문신 이규보의 묘소와 석물이 있는 '이규보묘'











이름 모를 저수지 옆, 기분 좋아지는 길을 걷는다. 쪽빛 저수지, 조그만 숲, 밭, 단출한 농가, 좁다랗고 구불한 길은 조화롭고 평화스러운 전원 마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김주영의 소설 '객주'를 읽을 작정이다. 어느 비평가는 '소설 객주는 떠돌이 보부상의 삶을 추적하여, 역사의 뒷면에서 활약하다 사라진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했다. 읽은 것 같은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요 며칠 전부터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객주'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젠 서구의 고전들보다 동양의 고전들, 특히 우리나라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을 찾아 읽고 싶다. 아마 수구초심首丘初心과 비슷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이규보李奎報의 묘,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 이규보는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많은 글을 썼다.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의 다수 저서를 남겼다. 이규보는 여주 출생으로 추정되나 말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한 이곳 길상면 길직리에 묻혔다.



마을에서 만난 한 쌍의 느티나무, 안내문에 적혀있는 글이 재밌다. 제목은 큰나무(길직리 부부느티나무)이고, 그 내용 중 '너무 시원한 그늘 때문에 한 여름 농사철에 잠시 휴식을 즐기며, 한 잔 두 잔 마시던 술에 하루 해가 저물게 되고, 남자들이 농사일을 제대로 못하게 되자 이를 참다못한 아낙들이 직접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는 문구가 있다. 작금은 그 위상이 거꾸로 뒤집히고 있지만, 과거엔 생활의 고통은 여자들만의 몫인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여자들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수다로 시간을 보냈으면, 저 두 그루 느티나무는 베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100코스 종점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지만 주변에 식당은 없다. 당연히 가게도 없다. 곤릉 버스정류장 부스에 들어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숙제를 하기 위해 외포리 모텔을 검색했다. 연휴 기간이라 숙박업소가 큰소리칠 수 있는 시간이라 조심스레 몇 곳의 업소와 통화했다. 이미 만실인 경우도 있고 마지막 남은 방이 조건에 맞지 않아 예약을 못하기도 했다. 오래전 행사를 위해 외포리에 왔을 때 숙박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텔에 마지막 남은 방을 예약했다. 잘 곳은 확보했으니 다소 여유로운 기분으로 걸을 수 있다. 101코스 진강산으로 들어간다.
서해랑길 101코스 13.3km 5시간 어려움


곳곳에 숨어있는 고려시대의 역사 문화를 찾으며 강화의 마을과 논밭을 거니는 코스이다. 고려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묘 '강화가릉' 불음도, 아차도, 주문도행 선박이 운행되는 '외포항'


안내판에 이렇게 적혀있다. 석릉碩陵 <석릉이 진강산에 자리함을 아노니, 빈숲에 홀로 문 닫고 있자니 달그림자 차갑구나, 아, 우리나라 조정에서 봉분을 수축하고, 해마다 지방 관리가 받들어 살핀다네.>









진강산을 내려와 마을을 지나고 드디어 건평항에 도착했다. 이제 강화서부해안로를 따라 걸으면 오늘의 목적지 외포리에 도착한다. 도로변 작은 공원에서 쉬어가려 들어왔는데 누군가 벤치에 앉아있다. 뒤에서 얼핏 보아도 '어린 왕자'다. 그래 심심한데 잘 됐다. 나도 벤치에 앉아 말을 걸었다. 우리는 잠깐이지만 대화를 나눴다. 별 다른 의미는 없는 대화이다. 그런데 이 친구 기분이 별로인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상관없다. 여기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 천상병을 기념하는 작은 공원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시 '귀천'과 천상병 선생의 동상은 나를 기쁘게 한다. 다만 이 소공원이 먼지와 소음이 가득한 도로변이라 아쉽다.

시인 천상병은 <귀천>을 비롯한 여러 명시를 남긴 현대 문학계의 거성으로, 대체로 순수한 마음으로 인생을 노래하는 시를 남겼다. 그에 걸맞게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수차례 전기고문을 당한 탓에 이후 30여 년의 세월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받았다.(나무위키 발췌)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몇 년 만에 다시 온 강화 외포리지만, 포구 한쪽에 함상공원이 생긴 것을 빼면 외포리는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해와달모텔이 오늘의 숙소이다. 외포리버스정류장 맞은 식당에서 청국장을 먹었다. 석양이 내리는 외포리항을 천천히 걸어 숙소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