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 고래마을
20220512(목) 울산 장생포 고래마을을 다녀오다.

장생포 고래잡이 역사는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태평양 어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그 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포경업을 독점하면서 장생포가 우리나라 포경업의 중심지로 부각했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최인호 작사, 송창식 작곡·노래, 〈고래사냥〉
예부터 동해는 고래의 바다였다. 고래잡이의 ‘메카’ 울산 장생포는 포경(捕鯨, 고래잡이) 전성기였던 1970년대 말을 전후해 10여 년간 울산 최고의 부자마을이었다. 포경선이 풍어 깃발을 올리고 배 옆에 고래를 낀 채 귀항하면 마을은 잔치 분위기로 들썩였다. 이때의 장생포에는 20여 척의 포경선이 있었고, 인구가 1만여 명에 이른 때도 있었다.(현재의 주민 수는 3천 여 명)
고래는 멸종위기 동물이다. 1949년 설립된 국제포경위원회(IWC)는 무분별한 포경으로 고래 자원의 감소 징후가 뚜렷해지자 1982년 ‘상업 포경 모라토리움’을 결의하고 1986년부터 상업 포경을 전면 금지했다. 우리나라도 이때부터 포경이 금지됐다. 장생포의 좋은 시절이 간 것이다. 이후 장생포는 공업지역으로 급속히 변모하였다.

장생포 고래마을은 부둣가 도로를 기준으로 언덕 쪽에 장생포 옛 마을, 고래광장과 고래조각공원, 5D 입체영상관이 있고 도로로 내려와 부둣가에 조성된 광장을 중심으로 고래박물관, 고래생태체험관, 울산함, 고래바다여행선 선착장이 있다.
각 시설마다 입장료가 있으며 '해피카드'라 불리는 일종의 자유이용권이 성인 기준 7,200원이며 카드 결제만 가능하다.
고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 관람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고래 관광자원화'는 포경 금지로 인해 쇠퇴한 장생포 지역경제에 큰 보탬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스갯 소리 하나, '고래의 고향'라고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엉터리다. 장생포는 그야말로 '고래의 무덤'이었다. 고래가 어찌 장생포에 실려오고 싶었겠는가?








고래는 예로부터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동물로 알려져 왔으며, 고래고기, 기름, 심줄 등이 다양하게 쓰여 왔다. 특히 고래기름은 고래의 부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이용되어 포경의 주원인이 되었다. 고래는 종류에 따라 기름의 성질도 제각각 달라 쓰이는 용도 또한 다양했다.
긴수염고래의 고래기름은 마가린 등의 식료품과 화장품, 비누 등을 제조하는데 이용하였고, 향고래의 기름은 세제나 윤활유, 기계유, 양초, 약품 등을 제조하는 등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한편, 고래수염이나 향고래의 아래턱뼈 등은 공예품의 재료로 쓰이고, 뼈는 고래기름을 채취한 후 비료나 가축의 사료로도 이용되어 왔다.(출처:장생포 고래문화특구 홈페이지)


고래조각공원에 전시된 고래들 ①대왕고래(길이 30m, 무게 200t) ②귀신고래(길이16m, 무게 35t) ③밍크고래(길이 8.6m, 무게 12t) ④향고래 또는 향유고래(길이 18m, 무게 45t) ⑤범고래(길이 9.8m, 무게 10t) ⑥혹등고래(길이 16m, 무게 35t)] 이 중 네 번째 향유고래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등장하는 그 고래이다.
장생포 고래박물관은 3개 층의 전시관과 기념품 판매점 등의 부대시설이 있다. 매주 월요일이 휴관일이며 관람은 09시부터 18시까지이다. 고래에 관한 국내 최대, 최고의 다양한 자료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어린이들의 고래 및 해양생태학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래생태체험관은 지상 3층의 규모로 우리나라 최초의 돌고래 수족관이라 한다. 바닷물고기 수족관과 생태 전시관 및 과거 포경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디오라마가 전시되어 있어 장생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2층에는 어린이들이 입체영화 속에서 고래를 만날 수 있는 4D영상관이 운영되고 있다.


울산함 관람을 마지막으로 장생포 고래 구경을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