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30, 31 (무전해변 - 고성읍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동방법인 걷기는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규격화된 문명과 온실 속 문화에는 이제 싫증이 난다. 내 박물관은 길들과 거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마시는 수프인 것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 중에서...
※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93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자이며 칼럼리스트이다. 은퇴 후인 1999년,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 2천 킬로의 실크로드를 4년 간 도보로 여행했다.
30코스는 무전동 해변공원에서 원산리 바다휴게소까지 16.3km의 길이다. 발암산 제석봉 및 도덕산 백우정사, 관덕저수지등 등산로 구간으로 이어지는 난이도 5점의 쉽지 않은 코스이다.
3월 15일(수) 통영버스터미널 도착 후 시내버스를 타고 30코스 출발지 무전해변공원에 12시가 조금 못되어 도착했다. 고성에서 1박 후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다음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오늘내일 날씨는 맑다. 낮에는 기온도 많이 오른다. 걷기에 좋은 날씨다.
30코스는 대략 이렇다. 통영 시내인 무전동의 해변공원에서 출발 후 동원중고등학교를 지나 용봉사 입구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그 다음은 계속 산 속을 걷는다. 향교봉(150m)-제석봉(280m)-발암산(276m)을 거쳐 산을 빠져나오면한퇴마을이다. 거기서 개천길을 따라가면 관덕저수지가 나오고 도덕산과 시루봉 사이의 임도를 지나면 원동마을이다.
이제 길은 바다 쪽을 향하고 해안을 만나 조금 걸으면 30코스 종점인 바다휴게소가 나온다.
제석봉과 발암산 두 산은 높진 않지만 통과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차라리 고도가 높더라도 봉우리가 하나여서 한 번 힘써 오르면 그 다음은 쉬운데 여긴 두 산 사이의 봉우리가 여러 개라 오르고 내리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마치 두 산이 나를 데리고 희롱하는 듯하다. 내리막이 무섭다. 또 오르라 할 테니...
발암산 정상을 통과하여 산길을 걷는 중에 재밌는 광경을 보았다. 어느 고갯마루에서 나무에 해먹을 걸어 놓고 중년의 남자 하나가 누워서 책을 보고 있다. 아! 이건 또 무슨 신선놀음인가? 두 소나무 사이에 걸어논 해먹, 낯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이 불고, 맑고 따스한 해살이 내려쬐고 바로 아래로는 남해 바다가 훤히 보인다. "오! 멋지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를 보더니 그 사람 "어디까지 가십니까"하고 묻는다. "그냥 가는 데까지 갑니다" 손 한번 들어주고 산길을 따라 마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 보이는 관덕저수지 왼편으로 임도가 나있다. 도덕산(341m)과 시루봉(370m)사이의 임도이다. 여기 고갯마루에도 정자가 하나 있고 그곳에서 산림감시인을 만났다. 이 양반도 나를 보고 오늘 여길 통과하는 3번째 사람이라 한다. 이제 곧 어두워지니 오늘 남파랑길을 걷는 사람은 결국 세 사람뿐이란 말이다. 아까 발암산 초소에 계신 분은 통영군 소속이고 이 분은 산림청 소속이다. 처우는 비슷한데 근무 방식은 조금 다른 듯하다. 잠깐 쉴 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마을을 만나고 그리고 해변을 만나게 될 길을 밟아나간다. 사위는 조금씩 어둑해진다.
3월 15일 오후 6시를 조금 넘겨 30코스 종점인 바다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다. 휴게소라지만 편의점 외엔 쉴 수 있는 벤치 하나 없다. 할 수 없이 휴게소 귀퉁이 버스정류장 대기실에서 가방에 남은 김밥 한 줄을 먹고 잠쉬 쉬었다. 이제 6-7km 정도 가면 고성읍이다. 오늘은 고성 시내 모텔에서 숙박하면 될 것이다. 오늘 일몰이 6시 30분경이니 곧 어두워지겠지만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니 오히려 걷기엔 더 운치가 있을 듯하다. 고성읍을 향해 다시 출발.
출발한 지 몇 백 미터를 못 간 길가 풀숲에서 누군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무도 없어야 당연한 길이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다. 이 분은 오늘 남파랑길을 걷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무전해변 남파랑 안내 입간판 앞에서 내가 사진을 찍어 주었고, 같이 걷자고 하였으나 먼저 출발하시라고 했던 분이다. 그리고 내가 발암산 정상에 막 도착했을 때 이분은 거기를 막 떠나려는 참에 또 보았다.
손에 든 까만 봉지에 쑥이 한가득이다. 대구엔 아직인데 여긴 쑥이 많다며 길가에서 쑥을 뜯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발걸음을 같이 한다. 나는 고성으로 계속 간다고 말했고, 이 분은 통영으로 돌아가 숙소를 잡을 예정이었는데 동행이 있으니 자신도 같이 고성으로 가겠다고 해서 자연스레 해 질 녘 길동무가 되었다. 남파랑길을 걸으며 길동무와 함께는 처음이다. 일몰의 해안은 언제나 아름답다. 바다는 붉게 물들고 갯벌은 어둑 거뭇해진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길을 걷는다. 이분은 대구가 집이고 나보단 몇 살 더 먹은 듯한데 성씨가 박 씨인 여성분이다.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하고 걷기도 하는 여행마니아인 듯하다. 우리는 어두워져서야 도시의 불빛이 가득한 고성시내에 도착했고 같은 모텔에 방을 잡았다. 물론 각각이다. 시내에 도착해서 잘 가시라 인사하고 헤어질까 했지만 그래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방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내일은 출발시간이 다르니 길에서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