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남파랑길 30, 31 (무전해변 - 고성읍내)

로드워커 2023. 3. 5. 11:17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동방법인 걷기는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규격화된 문명과 온실 속 문화에는 이제 싫증이 난다. 내 박물관은 길들과 거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마시는 수프인 것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 중에서...
 
※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93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자이며 칼럼리스트이다. 은퇴 후인 1999년,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 2천 킬로의 실크로드를 4년 간 도보로 여행했다.  

남파랑길 30코스도

30코스는 무전동 해변공원에서 원산리 바다휴게소까지 16.3km의 길이다. 발암산 제석봉 및 도덕산 백우정사, 관덕저수지등 등산로 구간으로 이어지는 난이도 5점의 쉽지 않은 코스이다. 
 
3월 15일(수) 통영버스터미널 도착 후 시내버스를 타고 30코스 출발지 무전해변공원에 12시가 조금 못되어 도착했다. 고성에서 1박 후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다음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오늘내일 날씨는 맑다. 낮에는 기온도 많이 오른다. 걷기에 좋은 날씨다.

30코스는 대략 이렇다. 통영 시내인 무전동의 해변공원에서 출발 후 동원중고등학교를 지나 용봉사 입구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그 다음은 계속 산 속을 걷는다. 향교봉(150m)-제석봉(280m)-발암산(276m)을 거쳐 산을 빠져나오면한퇴마을이다. 거기서 개천길을 따라가면 관덕저수지가 나오고 도덕산과 시루봉 사이의 임도를 지나면 원동마을이다.
이제 길은 바다 쪽을 향하고 해안을 만나 조금 걸으면 30코스 종점인 바다휴게소가 나온다.  

배판다
30코스 출발지 무전해변에 정박 중인 배. 현수막엔 작은배 3천만원, 큰배 1억6천만원^^
제석봉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
발암산 정상, 바로 옆에 산불 감시초소가 있다. 근무 중인 산불감시요원이 오늘은 내가 3번째로 여길 지난다고 한다. 다른 곳과 달리 여기는 임도가 없어 이 분은 걸어서 출퇴근을 해야 한다. 그래도 좋은 근무지아닌가? 산불 감시요원의 퇴근 시간은 일몰 시간이다.

제석봉과 발암산 두 산은 높진 않지만 통과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차라리 고도가 높더라도 봉우리가 하나여서 한 번 힘써 오르면 그 다음은 쉬운데 여긴 두 산 사이의 봉우리가 여러 개라 오르고 내리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마치 두 산이 나를 데리고 희롱하는 듯하다. 내리막이 무섭다. 또 오르라 할 테니...
발암산 정상을 통과하여 산길을 걷는 중에 재밌는 광경을 보았다. 어느 고갯마루에서 나무에 해먹을 걸어 놓고 중년의 남자 하나가 누워서 책을 보고 있다. 아! 이건 또 무슨 신선놀음인가? 두 소나무 사이에 걸어논 해먹, 낯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이 불고, 맑고 따스한 해살이 내려쬐고 바로 아래로는 남해 바다가 훤히 보인다. "오! 멋지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를 보더니 그 사람 "어디까지 가십니까"하고 묻는다. "그냥 가는 데까지 갑니다" 손 한번 들어주고 산길을 따라 마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덕저수지

앞에 보이는 관덕저수지 왼편으로 임도가 나있다. 도덕산(341m)과 시루봉(370m)사이의 임도이다. 여기 고갯마루에도 정자가 하나 있고 그곳에서 산림감시인을 만났다. 이 양반도 나를 보고 오늘 여길 통과하는 3번째 사람이라 한다. 이제 곧 어두워지니 오늘 남파랑길을 걷는 사람은 결국 세 사람뿐이란 말이다. 아까 발암산 초소에 계신 분은 통영군 소속이고 이 분은 산림청 소속이다. 처우는 비슷한데 근무 방식은 조금 다른 듯하다. 잠깐 쉴 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마을을 만나고 그리고 해변을 만나게 될 길을 밟아나간다. 사위는 조금씩 어둑해진다.  

도선마을 해안에서 본 '따박섬'과 양식장 풍경
30코스 종점 바다휴게소.

3월 15일 오후 6시를 조금 넘겨 30코스 종점인 바다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다. 휴게소라지만 편의점 외엔 쉴 수 있는 벤치 하나 없다. 할 수 없이 휴게소 귀퉁이 버스정류장 대기실에서 가방에 남은 김밥 한 줄을 먹고 잠쉬 쉬었다. 이제 6-7km 정도 가면 고성읍이다. 오늘은 고성 시내 모텔에서 숙박하면 될 것이다. 오늘 일몰이 6시 30분경이니 곧 어두워지겠지만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니 오히려 걷기엔 더 운치가 있을 듯하다. 고성읍을 향해 다시 출발. 
 
출발한 지 몇 백 미터를 못 간 길가 풀숲에서 누군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무도 없어야 당연한 길이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다. 이 분은 오늘 남파랑길을 걷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무전해변 남파랑 안내 입간판 앞에서 내가 사진을 찍어 주었고, 같이 걷자고 하였으나 먼저 출발하시라고 했던 분이다. 그리고 내가 발암산 정상에 막 도착했을 때 이분은 거기를 막 떠나려는 참에 또 보았다.
 
손에 든 까만 봉지에 쑥이 한가득이다. 대구엔 아직인데 여긴 쑥이 많다며 길가에서 쑥을 뜯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발걸음을 같이 한다. 나는 고성으로 계속 간다고 말했고, 이 분은 통영으로 돌아가 숙소를 잡을 예정이었는데 동행이 있으니 자신도 같이 고성으로 가겠다고 해서 자연스레 해 질 녘 길동무가 되었다. 남파랑길을 걸으며 길동무와 함께는 처음이다. 일몰의 해안은 언제나 아름답다. 바다는 붉게 물들고 갯벌은 어둑 거뭇해진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길을 걷는다. 이분은 대구가 집이고 나보단 몇 살 더 먹은 듯한데 성씨가 박 씨인 여성분이다.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하고 걷기도 하는 여행마니아인 듯하다. 우리는 어두워져서야 도시의 불빛이 가득한 고성시내에 도착했고 같은 모텔에 방을 잡았다. 물론 각각이다. 시내에 도착해서 잘 가시라 인사하고 헤어질까 했지만 그래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방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내일은 출발시간이 다르니 길에서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고성가는 길, 월평리 해안의 석양 빛에 물든 갯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