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44 (평산항 - 서상면)
2023년 3월 30일(목) 날씨 맑음, 미세먼지 영향으로 대기는 여전히 뿌옇다. 오늘은 3박 4일의 출장(?) 걷기 중 4일 차 마지막 날이다. 44코스가 끝나는 서상면에서 버스를 타고 남해터미널, 그리고 집으로 갈 것이다.
남파랑길 44코스는 길이 13.5km에 약 5시간 소요되는 난이도 '어려움'의 길이다. 남해바래길에서는 본선 12코스 '임진성길'이라 불린다.
두루누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축성되어 지역을 수호한 임진성으로 향하는 길, 조붓한 농로와 숲길을 걸으며 임진성을 통과하여 마을길, 천황산 숲길로 이어지는 코스, 아름다운 뷰를 선사하는 천황산 숲길을 지나 노을이 아름다운 남해스포츠파크에서 마무리하는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내가 걸은 남파랑길 44코스 이렇다. 평산항에서 출발하여 평산 2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 망기산(341m) 자락의 숲길을 걷는 코스이나 아침부터 산길을 걷기 싫어 경관이 좋은 1024번 도로를 따라 오리마을까지 걸었다. ▶남해아난티 GC를 지나 산이라 할 순 없고 동네 중간에 있는 구릉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기왕산(105m)으로 걸으면 ▶ 임진성을 만난다. ▶남구마을을 지나며 산자락에서 소류지를 하나 만나고 ▶여기서부터는 천황산(394m) 임도를 걷게 된다. ▶산을 내려가면 장항마을과 해수욕장을 지나 44코스 종점인 남해스포츠파크에 도착한다.
임진성을 내려와 마을을 지나던 중 컨디션이 갑자기 떨어지는 걸 느꼈다. '덤핑증후군'이 온다. 5년 전 수술 이후, 덤핑증후군은 자주 그리고 그 강도도 세게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며 발생 빈도와 강도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제는 가끔씩 그리고 그리 세지 않은 강도로 나타났다 진정되곤 한다. 오늘 아침, 걷는 도중 갑자기 앞이 흐릿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는 덤핑증후군이 또 왔다. 흔히 하는 얘기로 '당 떨어진다'와 비슷한 상태이다. 잠시 쉬고 나니 기력이 되살아난다. 다시 배낭을 메고 천황산 임도를 향해 산길을 오른다.
옛날에 만석꾼 지주가 하인이 끄는 조랑말 타고 하루 종일 제 땅을 돌아보았듯이, 나도 내 땅을 둘러보느라 해질 때까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둘러보는 보는 모든 곳이 내 땅이니 길을 걷는 것은 즐겁고 보람차다. 게다가 마을마다 사람들이 논밭 그리고 나무와 숲을 스스로 가꾸어 놓으니 보기에 아름답고 마음이 흐뭇하다. 걷기는 일장춘몽인가? 그러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쪼그라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일상을 길을 걷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법을 체화해 간다면 몸과 마음은 자유와 평온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이제 제대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는 혼자 도보여행을 해야만 한다. 여러 명이 함께, 혹은 심지어는 두 명이 함께 도보여행을 할 경우 도보여행은 이름만 도보여행이 되고 만다. 그것은 도보여행과는 다른 무엇으로, 오히려 소풍에 가깝다. 도보여행은 혼자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멈춰 서기도 하고, 계속 길을 가기도 하고, 이쪽 길이나 저쪽 길을 따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리듬대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당나귀를 타고 세벤 지방을 여행하다》중에서
※ Robert Louis Stevenson(1850-1894) 영국의 소설가. 바다와 항해, 모험을 동경한 데다 워낙 병약한 체질이어서 요양할 겸 유럽 각국을 여행했고 사모아에서 일정 기간 체류하기도 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쓴 《보물섬 Treasure Island》을 발표하여 유명해졌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 The Strange Case of Dr.Jekyll and Mr.Hyde》등의 화제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