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남파랑길 80, 81 (회진항, 마량항 그리고 가우도)

로드워커 2023. 5. 21. 19:57

2023년 5월 16일(화) 어쩌면, 남파랑길 마지막 여정의 둘째 날이다. 오전 7시 여관을 나왔다. 어제는 힘들었나 보다 온몸이 뻐근하다.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회진 거리를 어슬렁 천천히 걸어본다. 거리와 항구엔 안개가 가득하다. 오늘은 80, 81코스 합계 36km를 걸을 것이다. 81코스 종점 가우도 입구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강진읍내로 이동하여 숙박할 예정이다. 

숙박한 여관과 회진시외버스터미널 그리고 회진항 거리 풍경
오늘이 회진 장날이다. 장터를 기웃거리다 오이와 당근을 사서 배낭에 넣었다. 나중엔 무게 때문에 괜한 짓을 했나 약간 후회.
안개로 가득한 회진항
남파랑길 80코스도

남파랑길 80코스는 회진버스터미널에서 마량항까지 20.0km로 약 6시간이 소요되는 난이도 쉬움의 길이다.
남파랑길 홈페이지 두루누비에서는 「이청준, 한승원 문학길을 따라 걷는 구간으로 이청준 생가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주요 장소를 둘러볼 수 있는 코스, 회령진성, 이청준 생가, 천년학 세트장 등을 지나 강진군의 마량항 일대로 연결되는 구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길은 이렇다. 회진버스터미널 출발 - 천년학세트장(2.5k) - 진목마을회관(6.3k) - 대덕천방조제(11.1k) - 동신마을회관(14.4k) - 신마마을회관(18.7k) - 마량항(20k) 도착이다. 장흥에서 강진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산은 없고 해안과 마을 그리고 넓은 간척지의 농로와 방조제를 지나 마량 항구에 도착하는 코스다.

길1, 지척만 겨우 보이는 회진항 해변길
길2

회진항을 나와 길로 들어서니 짙게 낀 안개가 운치를 더한다. 바다를 곁에 하고 안개가 자욱한 길을 가능한 천천히 걷는다. 겨우 몇 십 미터 앞의 길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길을 걷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차분해지고 은은한 즐거움까지 느껴진다. 길 왼편은 바다지만 선박의 엔진소리만 간간이 들리고, 오른편은 언덕 위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만 들린다. '안갯속'이란 표현은 어떤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의 '안갯속'은 그냥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흐릿함 속의 명확함이다. 길 좌우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소리가 잦아들면 물새와 숲새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안갯속의 아침을 천천히 걷는 것은 축복이다. 걷지 않으면 이런 분위기와 기분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혼자만 누리는 즐거움이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천년학세트장에 공공근로 나오신 마을 주민들
길2
아침이 되자 별들은 나무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목마을, 이 마을을 지나면 간척지로 들어선다.
길3, 간척지 농경지 농로
보리밭, 이 보리를 베고 나면 벼가 심어질 것이다.

전라도의 간척지, 여기 간척지 땅엔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의 길이 놓여있다. 이 길은 저 멀리 지평선을 만나 그 자취를 감춘다. 강원도나 경상도에선 볼 수 없는 거대평원이다. 길을 지나는 나그네는 경작지의 규모에 주눅이 든다. 아기자기함은 없지만 뻥뚤린 시원함이 있다. 그래서 이것도 좋다.
이 평원을 지나면 길은 장흥의 길에서 강진의 길로 바뀐다. 보통사람들에겐 아무 차이나 의미도 없지만 위정자들에겐 중요한 소위 행정구역이란 경계다. 우리네 위정자들, 찟고 나누는 건 잘 하지만 이제는 합치는 것도 조금 더 잘했으면 좋겠다. 이 땅을 지키고 살찌워나가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쪼록 깨침이 있기를... 

강진군은 500.9㎢의 면적에 1읍 10면의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어 약 33,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행정구역 중 마량면, 대구면, 칠량면, 강진읍, 도암면, 신전면의 순으로 남파랑길이 통과하고 있다.

기록을 하다 잠깐 본 TV에서 소리꾼 장사익이 부르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그게 맘을 좀 흔든다. 5월의 뙤약볕 아래서 '해지는 서편'을 향해 걷는 나그네에게 노래 가사가 왠지 모를 공감을 주는 걸까?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뼏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길4, 마량항 방조제 입구, 멀리 보이는 다리는 완도군 고금도로 넘어가는 고금대교이다
어로방법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어떻게'가 이해 되지 않는다.
마량항
마량놀토수산시장과 거리 풍경
남파랑길 81코스도

오후 1시 30분경 80코스 종점인 마량항에 도착. 마량놀토수산시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점심은 식당엘 가지 않고 배낭에 있는 것을 꺼내어 간단히 요기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강진읍에 가서 정상적인 저녁 식사를 할 요량이다.
 
남파랑길 81코스는 마량항에서 가우도 입구까지 16.0km로 약 4시간이 소요되는 난이도 쉬움의 길이다.

두루누비에서는 「마량항에서 가우도 입구까지 강진군의 기 조성 걷기 여행길인 '바다둘레길'을 따라 걷는 해안길, 강진군의 핵심 관광 명소로 부상한 가우도까지 걷는 내내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관람할 수 있는 걷기 길」이라 소개하고 있다.

오후 1시 50분경 출발한 81코스는 이렇다. 마량항 출발 - 남호마을회관(6.2k) - 백사마을(10k) - 고바우공원(12.6k) - 가우도 입구(16.0km) 도착

길5, 수인리 해안도로
이해할 수 없는 섬의 모습, 야자수만 잔뜩 심겨져 있다. 왜?

오후 2시를 넘긴 시간, 태양이 뜨겁다. 갯벌도 바짝 말라버리는 것 같다. 변변한 그늘이 없어도 그냥 길가에 주저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남호마을
가우도 가는 길의 해변 풍경
백사어촌마을
하저어촌체험마을
가우도 입구

전라남도의 ‘가고싶은 섬'으로 선정된 가우도(駕牛島)는 강진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이다.가우도는 강진 대구면을 잇는 저두출렁다리(438m)와 도암면을 잇는 망호출렁다리(716m)에 연결되어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생태탐방로 ‘함께해(海)길‘(2.5km)은 산과 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천혜의 트레킹 코스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이름의 유래는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되고, 섬의 생김새가 소(牛)의 멍에에 해당 된다하여 '가우도(駕牛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후 5시 30분에 81코스 종점인 가우도 입구에 도착했다. 강진읍으로 가는 버스는 충분히 탈 수 있는 시간이다. 상가 주인께 정류장 위치를 확인하고 이동했다. 농어촌버스, 군내버스는 정류장에 앉아 한가롭게 기다려서는 타기 어렵다. 도로가에 서서 버스가 오길 기다려 강진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안착했다. 나는 항상 버스 맨 앞 쪽 자리에 앉는다. 시야가 확보되니 처음 온 고장을 구경하기 위함이고 기사와 소통하기도 쉽다. 그런데 이 버스 운전기사가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면서 운행을 하는 것 아닌가.  잠시가 아니다 운행하는 내내 통화를 한다. 한마디 하려다 꾹 참았다. 
 
읍내 거리로 들어가 여관을 잡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국밥집에서 선지국밥을 먹었는데 그게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고추기름이 잔뜩 들어 매웠고, 선지도 통상적인 모양과 좀 달랐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기대어 TV를 보는데 속이 심상치 않다. 체한 걸까? 왜 아프지? 위가 아픈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산책을 하면 나아질까 해서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에서 활명수를 사서 마시고 강진읍 거리의 어둑한 골목을 지나는데 신호가 온다. 구토다. 컴컴한 길가 한 켠의 수채구멍이 눈에 들어오자 드디어 터져버렸다. 수채구멍은 시원하게 날 받아준다. 아무도 없는 범죄(?)현장이라 다행이다. 그러고 나니 이제야 속이 편해진다. 하룻밤 집으로 돌아간다. 생전 처음 온 강진에서의 밤은 이렇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