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7(목) 추웠다. 바람이 많이 불고 가랑비도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걷다 갑자기 한마리 갈매기가 되어 바다 위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여기 얼마나 사셨어요?” “41년 요.” “그래요, 그럼 서금*씨 아세요.” “나이는 아마 여든 일곱 여덟 쯤 되었을 것이고, 키는 작고 억척 똑순이고 시장에서 일수놀이도 했었는데...” 잘 모른 듯 하다가 “아! 그래요 그 분요, 그 분 돌아가셨어요. 몇 년 전 요양원에서...” ...... 송정해수욕장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로 간단히 요기하면서 가게주인과 나눈 얘기다.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돌아가신 게 맞을 것이다. 가게를 나와 걷다가 ‘아니야 알 수 없어, 정확치 않아...’ 하고 생각을 헝클어버렸다.
“올해 멸치 많이 잡힙니까?” “네, 마이 잡힙니더.” “그래요 다행이네요, 좋네요.” 대변항 버스정류장에서 귀가 버스를 기다리다 옆에 앉은 아저씨께 말을 건네본다. 올해는 수온이나 물때가 좋아 멸치가 많이 잡힐거라 기대가 크다 한다. 음력 4월 초팔일 경이 제철이라 하니 얼마후 5월이 오면 대변항은 멸치 때문에 바쁘겠지. 이때의 멸치쌈밥은 별미다. 대변항 멸치배가 만선을 하고 식당도 손님들로 북적이길 기대해 본다.
칠레 대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바다를 노래한 시가 생각나는 을씨년스러운 바다의 분위기가 내게 와 닿는다. 암흑의 심연으로부터 달려온 바다의 전령사 파도, 그 파도는 갯바위를 만나 분노의 외침을 땅에 전한다. 그러나 땅은 처연히 무덤하다. 해안과 이어지는 구릉과 비탈, 그 뒤로 점점 쌓여가는 산과 계곡은 의연히 자리를 지킨다, 평지와 산비탈에 점점이 박힌 소박한 집들은 졸린 듯 평화로워 보인다. 바다의 기세에 개의치 않고 햇빛 아래 펼쳐진 대지는 평화롭다. 원래 땅과 바다는 하나에서 태동했고 둘은 형제였다. 제우스와 포세이돈도 땅과 바다를 나누어 다스렸다. 서로가 없으면 서로는 없다. 조물주는 지금도 이 땅을 다스리고 있을까 아니면 실망이 너무 커 내 팽개쳐 버렸을까?
송정을 지나며... 작은 아버지 생각에 잠긴다.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계신다. 육군 장교로 월남에 파병되었다. 월남전 전쟁 트라우마로 인한 노이로제로 항상 병 치레를 하셨고 건강한 날 하루 없이 고생하시다 저 세상으로 가셨다. 벌써 40년 전이다.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 아들을 보지 못해 큰집의 나를 양자로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 당하신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후 다행히 아들을 하나 두었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늘 송정 바닷가를 걸으니 당연히 작은집이 생각날 수 밖에 없었고 ‘송정’은 나에게 작은 집 그 자체다. 어릴 적 내가 피부병이 있어 여름방학을 거의 송정에서 지냈고, 작은 아버지가 삽을 들고 나를 해변으로 데려가 파묻고 모래찜질을 해주시던 해변의 그곳을 오늘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그 광경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른다. 따듯하고도 눈물겨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오늘은 해파랑길 2코스를 걸었다. 2코스는 14.6km의 길이로 중간 난이도이며 약 4시간이 소요된다. 해운대 해수욕장 관광안내소 앞에서 출발하여 청사포, 송정, 해동 용궁사, 오시리아 관광단지를 거쳐 대변항에 이르는 코스이다. 언덕이나 산은 없고 바다를 따라 걷는 평탄하지만 동해바다의 위용이 잘 드러나는 길이다.
기상이 좋지 않아 입고 간 옷이 몸을 보온하기에 조금 모자랐다. 집에서 출퇴근하며 코스 걷기를 하다보니 걷는 시간과 노력보다는 오고가는 대중교통편의 이용이 훨씬 힘이 든다. 하지만 울산권까지는 출퇴근 걷기가 훨씬 효율적이리라. 경주서부터는 2-3박 정도의 일정으로 출장 걷기를 해야할 듯 하다. 뭐 걷다 보면 도착하겠지, 고성에.
2코스 출발점인 해운대에서 유독 눈엣 가시처럼 걸리는 것이 바로 ‘엘시티’라는 초고층 주거빌딩이다. 온갖 비리의 온상이자 토건족과 가진 자들의 추한 욕망이 춤추는 괴물같은 유리와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름다운 해운대 해변을 무참히 짓누르고 있는 광경에 메스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해운대에서 청사포를 지나 송정에 이르는 모노레일인지 관광열차인지 모를 장사치들의 설치물도 아름다운 해변에 지울 수 없는 흠을 깊고 길게 파놓고 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일지라. 돈 냄새가 진동하는 현장이다. 더 이상 이런 개발을 빙자한 토건족과 자본가들의 빨대가 우리 땅에 꼽히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마 그리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며칠 동안 걷는 일은 걷는 사람이 그것을 내면의 여정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자신의 근심의 굴레를 손에서 놓지 않고 일종의 내려놓기에 유연하게 대처하는데 실패한다면 지극히 사소한 가치 밖에는 갖지 못한다.(느리게 걷는 즐거움-다비드 르 브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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