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6코스 15.5km 6시간 어려움(89.5)
아름다운 경관과 수많은 특산물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고장 진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며 명량대첩 승전보가 울렸던 현장이자 우리 민족의 얼이 서려 있는 길이다. 명량대첩 승전 광장의 랜드마크 ‘진도타워’, 진도군민들의 호구정신을 담은 ‘명량대첩승전광장’, ‘이충무공 전첩비’, 바위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벽파정’이 관광포인트이다.
발로 걷는 사람은 자동차로 운전하는 사람 혹은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거만하게 구는 일이 적을 것이다. 왜냐하면 걷는 사람은 언제나 인간의 높이에 서서 걸으므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세상이 거칠다는 것을 느끼고 길에서 지나치게 되는 행인들과 우정 어린 타협을 이룰 필요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브르통>
서해랑길 5코스를 끝내고 일찌감치 대교타운 근처의 한 모텔에 들어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한밤 중에 모텔 정전 사고가 발생했다. 몇십 년 만에 다시 겪어보는 정전이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린 밤 12를 넘긴 시간, 잠시 잠에서 깨었는데 방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프런트에 전화하려 보니 전화기조차 먹통이다. 윗옷을 하나 걸치고 더듬더듬 계단을 내려가 1층 안내실에 확인하니 정전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전에 연락했는데 지금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이불이라도 많이 덮고 주무시라고... 허, 황당하지만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잠을 청한다. 일어났지만 아직 어둡다. 방에 있던 랜턴을 켜고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현관으로 내려가니, 여관 주인이 읍에 가서 목욕이라도 하시라고 2만 원을 건넨다. 모텔 주변 건물들은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건물 내부 전기공급 장치가 고장 난 듯하다.
어찌 됐던 2025년 새해 아침은 독특하게 시작됐다. 나중에 '재밌었다' 정도로 기억될 듯하다.
2025년 1월 1일, 오전 7시 49분 일부러 일출을 보러 가는 여행을 사치라 생각하고 시큰둥하게 생각했던 내가 오늘은 자연스럽게 새해 일출을 보게 되었다. 그것도 머나먼 남도 진도에서. 역시 새해의 첫 태양은 눈으로 보기에도 마음으로 느끼기에도 멋진 모습으로 떠 오른다. 다만 엊그제 무안공항 참사로 우리 국민 모두가 착잡한 마음으로 일출을 지켜봐야 하는 게 안타깝다. 여기 모인 인근 주민들도 그러한 것 같다. 웃고 환호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이태원, 무안공항 이렇게 큰 참사들이 이렇듯 짧은 시간 안에 벌어졌다니 가슴이 먹먹하다. 다행히 나는 무늬만이지만 나름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으니 추모의 분위기를 거슬러고 있지는 않다는 위안을 해 본다. 산자는 계속 걸어야 한다.
어제는 그렇게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오늘 아침은 잔잔하고 상쾌한 공기와 따사로운 햇살에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2025년 새해 첫날의 분위기로는 최상이다. 날씨가 사람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그래서 '날씨라도 좋아야지' 이런 말이 공감이 간다.
진도갯벌은 수려한 주변경관과 생물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인근에 겨울 철새의 도래지가 있으며, 청정환경을 유지하고 있어 이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여 갯벌의 훼손방지 및 지속가능한 이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그 목적을 적고 있다.
여기 진도갯벌에 사는 물새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는데, 민물도요, 알락꼬리마도요, 괭이갈매기, 뒷부리도요, 중대백로, 민물가마우지, 검은머리물떼새, 청다리도요, 쇠오리 등이 산다고 적혀있다. 나는 왠지 '도요'라는 이름에 정감이 간다.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도요'의 어원은 찾을 수 없다. 왜, 도요새로 불릴까? 궁금하다.
도요목의 조류들을 통틀어 묶어 도요물떼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몸길이는 12~61 cm로 다양하며, 날개는 길지만 꼬리는 짧은 편이고, 부리는 길고 곧거나 위 또는 아래로 굽었다. 종류에 따라 다리와 목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갯벌이나 습지 등에 서식하면서 주로 갑각류, 조개 등 무척추동물을 잡아먹는다. 한국에는 36종이 알려졌는데, 대부분 여름철새 또는 나그네새이다.
걸어오다 벽파마을에 입구에서 만나는 첫 집인데, 마당을 보는 순간 반했다.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집터의 위치가 너무 좋고, 앞마당을 보는 순간 '그래 이거야'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기교를 잔뜩 들여 가꾼 인위적 정원은 아니지만, 울타리를 따라 늘어선 정원수와 다양하고 반듯하게 정돈된 남새밭이 태양 아래 수줍은 듯 온몸을 드러내고 있는 광경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아무도 없는 빈마당을 쳐다보는데, 찬거리를 준비하는 초로의 여주인이 텃밭에서 야채를 뜯고 할머니댁에 놀러 온 이쁜 손녀딸이 까불거리며 뒤 따르는 모습이... 이런 영상이 떠오른다. 이 집은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벽파마을'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적어도 내게는. 마을을 통과하며 더 넓고 화려하게 꾸며진 집들이 몇군데 보였지만, 나는 단연 이 집을 벽파마을 최고의 집으로 꼽겠다.
벽파진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기 위해 1956년 11월 29일 건립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3.8m, 폭 1.2m, 두께 58cm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이 고장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비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삽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
벽파항을 지나 마을 방조제를 지나는데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이 눈에 띈다. 인사 겸해서 "안녕하세요, 많이 잡았습니까?" 하니, 노인은 "아니, 이제 막 왔는디"라고 하신다. 그래서 또 "뭐가 잡힙니까?"하고 물었다. 노인은 "망둥어요"라고 한다. 나는 "망둥어 좋지요, 많이 잡으세요" 하고 지나가는데, 노인은 잡으려는 고기가 망둥어라 좀 민망해서인지 "집에 있으면 심심헌께"라고 말을 덧붙인다. 난 속으로 '망둥어 좋아요, 많이 잡으세요'라고 하며 걸음을 뗀다.
이 방조제를 지나면 연동마을이고 다음 선황산을 넘어가면 용장성이 나온다. 그곳이 6코스 종점이다. 평지를 걷는 것은 그런대로 할만했는데, 선황산 고개를 넘어 용장성으로 가는 산길은 힘이 많이 든다. 피로가 누적되는 느낌이 점점 강해진다. 오늘은 용장성을 내려가 7코스에 진입하여 평지 구간을 걷다 진도읍내로 들어가 쉬어야 할 것 같다. 새해 첫날이니 무리하기보다는 여유를 갖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용장성 홍보관으로 들어갔다. 새해 첫 날인데 관광객을 위해 문을 열었다. 몽고 침략과 삼별초에 관한 전시물을 구경하고, 믹스커피 한 잔을 들고 홍보관을 관리하시는 아주머니랑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었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고, 서해랑길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계시기에 말이 통해 반가웠다. 혼자 걷기 여행을 하다 보면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을 경우가 거의 없기에 때문에 사람과의 짧은 대화도 아주 즐거운 사건이 된다.
7코스로 들어가기 전 양지바른 벤치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용장성 텅 빈 넓은 주차장에 승용차 한 대가 와서 멈춘다. 노부모를 태우고 관광온 중년부부가 화장실 때문에 노인네을 모시고 차에서 내린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고 중년의 부인은 여행하면서 드시면 좋을것 같다고 목포기정떡 두덩이를 건넨다. 아주 고맙게 받았다. 잘 먹겠습니다.
얼마만큼의 짐인가 하는 문제는 여행자의 근심거리다. 너무 무겁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지나치게 인색한 짐은 조만간 어느 순간에 곤경에 빠질 위험도 있다. 여행의 안락은 짐 꾸리기에 달려있다. 먹을 것, 세면도구, 갈아입을 옷가지, 잘 때 덮을 것, 책, 기록할 수첩 등등은 노련한 계산을 필요로 한다. <르 브로통>
7코스 12.4km 5시간 난이도 '어려움'(101.7)
몽고항쟁지 진도 용장성을 시작으로 성재고개를 넘어 첨찰산으로 향하는 코스, 첨찰산 임도를 따라 오르고 호적한 숲길을 따라 진도 여행의 일번지이자 전통남화의 성지 운림산방을 만나는 코스이다. 배중손의 삼별초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항쟁하던 ‘용장성’과 ‘용장성홍보관’, 천혜의 자연을 갖춘 ‘죽제산산림욕장’, 조선 말기 남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기거하던 ‘운림산방’이 볼거리이다.
2025년 1월 1일 오후 1시 50분, 7코스를 출발하다. 출발 전 부터 마음을 먹었다. 현재의 몸 상태나 일몰까지 남은 시간 등을 감안할 때 첨찰산을 통과하는 길에 들어설 수 없다고. 그래서 다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도로를 따라 계속 걸으면 진도읍으로 갈 수 있다. 읍에서 하룻밤을 쉬고 내일 8코스 시작점인 운림산방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진도 첨찰산이 상징적 의미를 가지곤 있으나 물리적 한계란 것도 있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산길인 성재고개를 넘어 18번 지방도를 따라 걷는데 다리가 많이 아파온다. 혹 히치하이킹이라도 할 요량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쳐다보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진도고군농공단지 앞 삼거리 편의점 앞에 앉아 쉬다가 주인께 부탁하여 택시를 불러 탔다. 요금은 1만원. 가능한 택시는 타지 않는다는 다짐도 무너져 버렸다. 어서 가서 쉬고픈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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