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길 14코스는 대광리역에서 백마고지역으로 이어지는 기찻길을 따라 이동하는 길로 길이가 12.0km이고 약 4시간이 소요되는 난이도 '쉬움'의 길이다. 1914년 8월 14일 완공한 경원선 철도를 따라 걷는 코스로 6.25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역사문화자원이 많은 구간이다.



10월 29일 깜깜한 6시, 모텔을 나섰다. 어제 저녁을 먹은 한식뷔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할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대신 대광리역 앞 편의점으로 가 커피를 한잔 마셨다. 어젯밤 편의점 여직원이 정말 친절하게 응대해 줘 인상이 깊었는데 카운터의 남자가 그 여직원 하고 이목구비가 흡사하다. 그 남자에게 딸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따님이 아주 친절하다고 칭찬했다. 가만히 보니 편의점 사장에게서도 친절함이 느껴진다. 부전여전인 가보다.
이번 평화의 길 걷기의 3일 차이다. 오늘은 차탄천과 철길을 따라 연천을 떠나 철원 백마고지역으로 그리고 고석정으로 이동하는 경로이다. 아직 어둡지만 희미하게 여명이 밝아오는 대광리역을 떠나 백마고지 역을 향해 발걸음을 뗀다.



대광리역을 벗어나 차탄천을 따라 조금 걷자 공사 현장이 나온다. 국립연천현충원을 짓고 있는 현장이다. 서울과 대전 다음의 제3 현충원, 5 만기 규모로 2027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신탄리역은 1942년 12월 1일 경원선의 신호장(열차의 교차 운행과 대피를 위하여 설치한 장소)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역명은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자원과 숯이 유명했던 마을인 '신탄리'에서 유래한다.


부부가 외국인 근로자 둘을 데리고 밭에 일하러 나왔다. 지나가며 인사를 하니 불을 쬐고 가라 하신다. 그렇지 않아도 불내음이 참 좋았는데 그 말에 성큼 밭으로 들어가 모닥불 옆에 섰다. 고대산에 가려 아직 밭에는 햇살이 들지 않는다. 할머니(?)는 손이 시려 일을 시작하기 어려워 불을 피웠다고 하면서도 불안해한다. 요즘은 소각을 하거나 들에 불을 놓고 있는 현장이 신고당하면 낭패를 본다. 평화의 길 걷기를 하면서 사람이나 차량을 볼 수 없는 외로운 길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인기척은 지역에서 운영하는 산불 감시 차량이다.


고대산 자락에 위치한 폐터널(일제시대 용산과 원산을 잇는 공사로 진행되던 터널이 일본의 패망으로 중단)에 6.25 당시 북한군 탄약 창고로 사용하다, 미군의 폭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터널 위쪽에 생긴 틈과 독특한 자연현상이 맞물리면서 역고드름이 생성된다. 길이 100m, 폭 10m의 터널 바닥에 역고드름 수백 개가 솟아오르는데,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 볼 수 있다.
지금도 천정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역고드름이 형성되는 과정이 현장을 보니 곧바로 이해가 된다. 신비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아픈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원선은 서울-원산 간 223.7km를 잇는 철도이다. 러.일 전쟁으로 군사상의 필요를 느낀 일본이 강압적으로 철도부설권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이관받아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착공하여 1914년 8월 14일 완공하였다. 사진의 차탄천 구 경원선 교량은 경원선의 119개소 교량 중 한 곳이다.
또한 여기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이다. 김포에서부터 줄곳 함께 해 오던 경기둘레길과도 작별한다. 평화의 길은 강원도 철원으로, 경기둘레길은 포천을 향해 각자 제 갈 길을 향해 가는 이별의 지점이다.



백마고지는 6.25 전쟁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후의 형상이 누워있는 백마처럼 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 전투를 수행한 9사단의 애칭이 백마부대로 불린다.

14코스가 끝났다. 백마고지역에서 이곳저곳 살피며 휴식을 취한다. 역의 농산물 판매장에서 걸으며 해결하는 중식을 위해 건빵 2봉을 구입했다.(먹어보니 맛이 있어 비상식량으로 2봉을 더 구입하여 배낭에 챙겨 두었다)

평화의 길 15-1코스는 15코스의 우회로이다. 16코스 예약이용이 어려울 경우 이 코스를 이용하여 백마고지역에서 고석정으로 간다. 길이가 21.3km이고 약 7시간이 소요되는 난이도 '보통'의 길이다. 철원역사문화공원, 노동당사, 도피안사, 학저수지, 직탕폭포, 고석정 등이 이 코스에 있다. 볼거리가 많은 길이다. 아래와 같은 코스 상황을 검토할 때 15-1코스 이용이 맞다.



15코스(백마고지역에서 두루미평화타운까지 19.4km)는 16코스 예약이 되지 않으면 진입하지 않아야 한다. 16코스(두루미평화타운에서 도창리검문소까지 21.2km)는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예약노선이다. 16코스 예약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다면 15-1코스를 이용하여 곧바로 고석정까지 가는 편이 적절하다.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철원 한탄강 일대에는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현무암 지대이다. 강이나 길 주변 곳곳에서 현무암을 볼 수 있다. 현무암으로 쌓은 돌담은 아주 멋있다. 돌담에 유달리 애착이 많은 나는 잘 쌓은 돌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코스를 따라 걷다 소이산 입구를 지나면 철원역사문화공원과 노동당사가 나온다. 그 한편에 국숫집이 있다. 아직 11시가 되지 않았지만 미리 점심을 먹기 위해 소이산 국숫집에 들렀다. 국수를 주문하고 철원이 고향인 식당 여주인과 재밌게 얘기를 나누었다. 나의 군 시절 얘기와 그녀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함께한 군대와 군인들, 현재의 군부대 상황에 대해 얘기했다.
요즘 접경지역 주민들은 예전과 다른 인구환경 변화에 많이 힘들어 한다. 군부대와 군인의 급격한 감소에 따라 상업활동에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 커질 터인데 어떤 대책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하긴 이는 접경지역의 문제만도 아니다. 인구 감소와 수도권 집중이 초래하는 지역 왜소화 또는 지역 소멸의 문제는 심각하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통만 커지고 팔다리는 쪼그라드는 형국인데, 이건 큰 병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체형으론 건강하게 살 수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강원도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노동당사는 1946년에 완공된 3층 건물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의 노동당사로 이용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6·25 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건물 전체가 검게 그을리고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게 나있다.
철원에 들어설 때 가장 보고 싶은 곳이 '노동당사'이다. 군남댐처럼 노동당사도 육안으로 직관하기는 처음이다. 대부분의 많은 나라들이 외환이던 내환이던 전쟁의 생채기를 갖고 있을 터이지만 한국전쟁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입혔다. 권력에 눈 먼 인간들이 낸 생채기에 새살이 돋아날 기미는 아직도 없다.

노동당사를 지나 중리 마을 농로를 걷던 중 개들의 습격(?)을 받았다. 농로를 걷고 있는데 저만치 앞에 개 두 마리가 길가를 서성이는 게 보인다. 다행히 가야 할 길은 개들이 있는 쪽이 아니라 좌회전 방향이라 안도하며 걸었다. 그러나 1분도 채 되지 않은 듯한 순간 셰퍼드처럼 생긴 덩치 큰 개 두 마리가 쫓아와 나에게 덤벼(?) 든다. 펄쩍 뛰어오르며 앞다리를 내게 들이민다. 깜짝 놀랐으나 개들의 표정이 공격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보니 나하고 희롱을 해보자는 작정인 것 같기도 한다. 바로 개들을 벗어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개 주인의 무심함에 화가 난다.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 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길 걷기를 하면서 걱정되는 것 중 하나는 목줄이 풀린 크고 사나워 보이는 개를 길에서 만나는 것이다. 야생 들개가 없는 것은 -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화진포 산길에서 들개를 만난 경험이 있다 - 다행이지만, 개 주인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시골이건 도시건 맹견에 의한 사고는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도피안사는 철원8경 중 하나이다. 국보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경내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핸드폰 충전을 하고 개들의 습격으로 흙이 묻은 옷을 닦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길로 들어갔다.

도피안사를 지난 얼마 후 '학저수지'를 만난다. 학저수지는 철원군 동송읍 오덕리에 위치한 저수지로 학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21년 일제가 설비하였다.

저수지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답고 다양한 수생식물과 철새들이 어우러진 자연 환경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평화의 길은 학저수지의 반쪽을 둘러 이어지는데 바다가 없는 내륙에서 오랫만에 만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청량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저수지 중앙엔 철새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끊김없이 기분좋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다. 철새들의 울렁거리는 노래를 들으며 하늘과 호수를 바라보며 물가의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쁜 나그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수지를 떠난다.



한탄강을 만나 잠시 휴식, 지금부터는 한탄강 주상절리 길을 따라 고석정까지 걷는다. 이제 막 씩씩한 청년으로 변모하는 남자 아이 같이 한탄강의 위세와 물소리가 당차다.


송대소 주상절리와 한탄강 부교, 그 뒤로 은하수교 주탑과 전망대가 보인다. 부교 위를 걷는 관광프로그램이 있는데 비싸기도 하거니와 코스에서 강 아래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위에서 감상만 했다. 코스인 줄 착각해서 은하수교를 건넜는데 좀 아찔하다. 확실히 늙었다는 증거다.
'송대소'란 명칭은 이무기를 잡은 옛날 송도 사람에서 기원한다. 송대소 주상절리는 현무암질의 뜨거운 용암이 빠르게 식으면서 생겼다. 고석정으로 가는 한탄강 길은 한국에선 보기 드문 비경을 보여준다. 눈이 호사하는 길이다.





고석은 한탄강 협곡 내의 높이 약 15m의 화강암 바위이다. 주변에는 고석정이라는 누각이 있어 이 일대를 고석정이라 부른다. 고석정은 철원 땅이 용암으로 덮이기 전인 기반의 화강암이 용암류에 덮인 후 침식작용으로 인해 다시 드러난 곳이다. 그래서 중요한 지질 연구 장소가 되었다.
영상으로 보았던 고석이 저 아래에 보인다. 하지만 피곤한 다리는 내려가 구경하는 걸 거부한다. 160~200 여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짓(?)을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 저녁을 먹고 모텔방에 들어갈 쉴 생각뿐이다.

궁예와 임꺽정의 얘기가 숨쉬는 철원평야 그리고 고석정이다. 먼저 궁예, 이곳의 넓고 편평한 지형, 그리고 일 년 내내 물이 얼지 않는 샘통 지역은 한 나라의 도읍지를 세울 조건이 되었다. 약 1,100년 전 서기 901년 신라 말기 '궁예'는 태국봉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이곳 철원평야를 수도로 정했다. 하지만 이 나라는 18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 도성은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현재의 상태를 알 길은 없다.
그리고 임꺽정, 양주 태생의 조선 중기의 의적이다. 여기 철원 동송읍 장흥리의 고석정은 임꺽정의 활동근거지로 전한다. 실존 인물이며 벽초 홍명희의 소설로 인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인물이다.


고석정 공원 내에 있는 직탕폭포와 송대소 주상절리 모형

고석정을 둘러 보고 저녁으로 우렁된장을 먹었다. 하루의 끝은 모텔 입성이다. 모텔 주인이 '꽃밭' 구경을 왔냐고 묻는다. 꽃밭? 몰랐다. 고석정 꽃밭은 유명한 관광지였다. 그러고 보니 점심 국숫집 여주인도 고석정까지 간다고 하자 꽃밭 구경가냐고 물었다. 모텔주인은 서리가 내려 꽃밭은 이제 끝났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유명한 꽃밭 단지가 있는지 몰랐고 사실 '꽃밭'에 조금의 관심도 없다. 방으로 올라가 내일을 위한 휴식에 들어간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났다.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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